• 최종편집 2024-02-27(화)
 

 

왜 하나님께서는 유능한 설교가만을 목사로 부르시지 않으실까?

 혹 유능한 설교가에게 설교를 들을 수 없는 그리스도인들은 받아야 할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요나를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였기에 문제의 선지자로 생각한다.

 

 이 문제의 선지자가 니느웨라는 대도시에서 설교를 했다. 당시 니느웨는 세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도시였고, 또한 우상의 도시이며 악독이 하나님께 상달되어 40일 후에 무너지게 되어 있을 만큼 강퍅한 곳이었다. 이러한 곳으로 일반적으로 이러한 곳에서는 설교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요나는 니느웨가 모두 회개하여 구원을 받는 큰 은혜를 끼치는 설교를 했다. 심지어 강대국의 무소불위한 권력을 지닌 왕도 회개했다.

  

그렇다면 단번에 니느웨 성을 회개시킨 선지자 요나는 설교를 잘하는 선지자로 평가되어야 하지 않는가? 진정 니느웨 성에서 요나가 한 설교는 잘한 설교였을까? 그리고 잘하는 설교만이 이러한 권능이 있는 것인가? 요나의 니느웨 성에서의 설교가 훌륭했다고 볼 수 없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다. 요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향했다. 다시스는 지리상 발견 이전인 당시로서는 땅끝이었다. 그러므로 선지자 요나는 땅끝으로 도망을 한 것이다. 그는 니느웨를 피해서 가장 먼 곳, 더 이상 갈 수 없는 땅끝으로 향했다.

 만약 다시스 보다 더 먼 곳이 있었다면 요나는 그리로 도망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니느웨가 싫었다. 왜냐하면 니느웨는 잔인한 점령국가로서 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수르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했다기보다는 니느웨를 피한 것이다.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들의 믿음과 헌신은 열정적이었으며 진실했다. 요나도 마찬가지였다. 요나가 원래부터 불순종의 사람은 아니었다. 요나는 단지 니느웨가 싫은 것뿐이었다. 그래서 니느웨가 회개하지 않으면 곧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요나는 오히려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될 것을 기대하였다. 요나는 반 니느웨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유대인들만이 특별하다는 특수주의(Particularism)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민족주의적인 애국자인 요나는 가능하다면 당장이라도 쳐들어가서라도 니느웨를 무너뜨리고 싶었던 사람이다. 회개만 하지 않으면 멸망을 하신다는 메시지는 요나에게는 복음이었다. 이 기회야말로 원수의 나라를 제거하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자신이 니느웨로 가기만 하면 어쩌면 니느웨가 구원받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더 멀리 도망을 치려한 것이다. 요나가 선택한 다시스는 땅끝이었을 것이다. 그가 바란 것은 하나님을 피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오로지 니느웨의 멸망하기를 바란 것이다.

 

도망치던 요나는 엄청난 풍랑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제비에 뽑힌 요나의 모습을 보면 선지자다운 진실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풍랑은 "나로 인한 연고이니 나를 바다로 던지라" 그러면 풍랑이 잔잔해져 배가 무사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요나의 죽음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돌이켜 니느웨로 가게 하시려는 것이다. 요나가 죽음의 결단을 한 것은 니느웨를 멸망과 자신의 목숨을 바꾸려는 의도일 수 있다. 배 안의 사람들을 구원코자 바다에 던져지겠다는 생각도 있을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니느웨의 멸망을 끝까지 원한 것을 아니었을까?

 

이후에 니느웨 성의 멸망이 지나간 후에, 요나는 니느웨 성이 구원받은 것이 너무나 분하였다. 그럴 줄 알고 빨리 도망했었노라고 하나님을 향하여 항변한다.(4:1,2). 요나는 니느웨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보면서 원통해서 죽는 것이 나으니 죽여 달라고 몸부림친다. 그후에 요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니느웨의 멸망을 기다리며 성의 동편에 초막을 치고 머물렀다.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꿈꾸며 은혜로운 선포를 하였을까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감동하게 해서 말씀을 준비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선지자이기전에 자신의 몸을 던져서 니느웨를 제거하고자 하는 마음뿐이었다.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설교자는 아니었다. 오직 멸망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구원 보다는 멸망을 강조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니느웨 성 사람들은 그런 요나의 메시지에 은혜를 받았다. 선지자라고 하면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였을 것이다.

 

 오늘 성도들은 능력있는 훌륭한 설교자를 원한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인정하신 선지자들이 다 뛰어난 설교자는 아니었다. 예레미야 같은 위대한 선지자의 메시지는 사람들을 아주 불쾌하게 하는 만들었을 뿐 아니라 분노를 가지게 했다. 예레미야의 40년 사역은 그의 간절함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이 메시지를 들은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미워하였고 죽이려고 했다. 특히 당시의 정치 지도자들은 반정부 운동가의 리스트 1위에 예레미야를 올렸다. 성도들은 자신이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설교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한다.

 

은혜받는데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설교자는 마땅히 은혜로운 설교를 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무시했다. 하나님께서 오셔서 직접 말씀하셔도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가인도 하나님의 말씀을 직법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은혜받기는커녕 오히려 분을 냈고, 동생을 죽이는 죄를 범하였다. 하나님께서 좋은 선지자들을 계속하여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섬겼고 그들이 살던 땅에서 쫒겨나야만 했다. 신자가 바울과 같은 설교가의 설교를 듣는 것은 복일 것이다. 그러나 에덴 동산의 사람들은 훌륭한 설교에도 은혜를 받지 못하였으며, 니느웨 성 사람들은 유능한 설교가 아니라도 생명의 은혜를 받았다. 성경을 보면 망할 청중이 있고, 은혜 받을 청중이 있다. 그러므로 청중은 말씀을 잘 듣는 능력이 필요하다.

 

 신자들은 잘 짜여진 설교를 듣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말씀으로 공감을 한다든지 좋은 감정을 갖는다고 하여서 은혜를 받고 능력이 임하는 것은 아니다 말씀에 뜨거운 감동과 은혜가 있었다고 그것이 능력으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성도들은 은혜 받는 것을 매우 귀중하게 여긴다. 그래서 설교자에게 은혜 받았다는 감사의 말도 건네는 것이다. 은혜를 끼치는 설교자를 존경하고 귀히 여기고 크게 여긴다. 그렇지만 감동되고 감정상에 시원함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능력을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받는 것도 중요하나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그때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삶을 통하여 놀라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뛰어난 설교자에게만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런 설교자에게서 설교를 들을 수 없는 청중은 결코 은혜를 받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꼭 기억할 것은 지금 나의 앞에 세우신 설교자는 다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이다. 하나님이 능력이 부족하여 설교자를 잘못 부르시는 일은 없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셨지만 실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어느 설교자를 세우시든지 듣는 일에 성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항상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만 오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중요한 때에 요나와 같은 선지자가 말씀을 가지고 올 때도 있다. 훌륭한 설교만 훌륭한 신앙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는 예레미야 같고 바울과 같아야 할 것이지만, 듣는 이들은 니느웨 성 사람들 같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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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설교 잘 듣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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